통번역

동시통역사도 번역기 쓴다

hkreal 2023. 5. 30.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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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이세돌 선수가 AI와 대국을 펼쳐 엄청난 화제가 됐었죠. 이후 어느 기관에서 기계번역과 인간이 번역 대결을 벌이는 행사를 열었습니다. 결과는 바둑과는 달리 인간의 대 승리였어요. AI가 사람의 언어 능력을 따라오려면 아직은 멀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이후 수년의 시간이 흘렀는데요. 아직도 번역기가 인간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기계번역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어요. 데이터 기반이기 때문에 확보되는 데이터의 양이 많을수록 뛰어난 번역 결과가 산출되지요. 아랍어/한국어, 파슈툰어/한국어와 같이 데이터가 부족한 언어쌍은 그렇지 않지만, 영어/한국어는 기계번역의 질이 엄청나게 높아졌습니다. 영어의 지위는 세계 공용어이기 때문에 영어와 다른 언어 쌍은 기계번역의 질이 상당히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제가 통번역대학원에 재학중일 때도 이미 기계번역은 실생활에 널리 쓰이고 있었어요. 하지만 질이 높은 편이 아니어서 참고용이었지 통번역사가 의존할만한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기계번역기에 원문을 넣고 산출된 여러 번역 결과물을 가지고 비교분석을 진행하는 수업도 했었죠. 법률 계약서나 기계 메뉴얼 등 정형화되고 반복적인 표현이 많은 문서는 기계번역이 상당히 도움이 됐었지만, 묘사가 많은 산문 등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불과 몇년 사이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업무상 형사소송, 행정소송에 관련된 판결문을 많이 번역하는데, 판사마다 문체가 다르고 사건마다 세부 내용이 달라 업무를 하면서 기계번역의 헤택을 크게 누리지 못했는데요. 특히 피고/원고의 진술 등은 더욱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판결문도 번역기를 돌리면 산출물이 꽤 괜찮게 나옵니다. 문장도 이전보다 훨씬 부드럽구요. 이 일을 시작한 지 2년 정도 되었는데, 2년 사이에 이렇게 발전한 것이죠! 길이가 긴 문장에서 혹시나 빼먹은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는 데도 요긴합니다. 요즘은 처음부터 원문을 번역기로 번역하고 저는 편집만 하는 경우도 있어요.(이걸 요즘 포스트 에디팅(기계번역 후 편집)이라고 하더라고요.)

얼마 전 한 국제회의에서 동시통역을 했는데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전에 동시 파트너와 통역할 부분을 나눠서 미리 자료를 준비해 갔습니다. 통역을 시작하기 전에 서로 자료를 공유했는데, 파트너의 자료 중 영어가 어색한 부분이 눈에 띄더라고요. 파트너 통역사는 저보다 훨씬 경험이 많고 실력도 출중한, 아주 잘나가는 분이었기 때문에 의아했어요. 그래서 물어봤더니 전날까지 다른 회의를 통역하느라 너무 바빠 자료를 꼼꼼히 준비할 시간이 없어 참고할 겸 주최측에서 미리 받은 자료를 번역기에 넣어서 인쇄해 왔다고 하더라고요. 이제 레파토리가 비슷한 연설문이나 강연 자료도 기계번역이 어느 정도는 소화할 수 있다는 말이죠.

참신한 표현이 녹아 있는 논평이나 문학적인 글은 기계번역이 넘보기에 아직은 시기 상조인 듯 합니다. 하지만 결국 데이터가 충분히 확보되면 기계가 상당한 수준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해질 겁니다. AI가 최후에 정복하게 될 영역은 문학이 되겠지요...이미 우리는 번역가나 통역사가 기계번역과 협업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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